제 5편 - 33평형, 한국인의 표준 삶
# 33평 스케치
아파트는 두개의 가치가 오묘하게 통합되었다.
1) 아파트는 돈 이다.
환금성과 안전성이 가장 중요하다.
2) 아파트는 삶의 그릇이다.
쾌적함과 편리함이 가장 중요하다.
아파트는 대체로 건축가들이 환영하는 디자인 대상이 아니다.
우선 외관이 밋밋해서,아름다운 형태를 이뤄 내기가 쉽지 않다.
미적 성취를 가장 중요시 하는 건축가들로서는 웬만해서는 눈에 띄지 않는 아파트를 선뜻 수행하고 싶지는 않아 한다.
그리고 다양한 조건들의 조정이 만만치가 않다. 법규가 까다롭고, 수많은 거주자들이 내놓는 요구조건들을 수용해야만 한다.
헌데 아이러니다. 이런 비호감? 아이템이 지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주거형식이 되었다.
아파트의 숨은 비밀을 열어 보자.
# 아파트 경제학. '빨리빨리, 많이많이'
천연자원이 풍부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인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집적하여 활용해야한다.
인적자원을 응집하는데 아파트는 단연 최고의 효율을 보인다.
이렇게 생존의 절박함에 따라서 우리는 아파트에 미래를 묻게 된 것이 아닐까!
그러기에 아파트는 묻어 두면 가치가 상승하는 안전한 재화로 인식되어 왔고,
바로바로 현금화 할 수 있는 돈과 같은 대체재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33평형(109㎡,링크참조)은 세대주가 쓰는 전용면적 85㎡에 로비나 엘리베이터 홀 등, 거주자들이 공용으로 쓰는 면적을 합친 이른바 국민주택을 말한다.
이는 통상 방3개에 거실과 부엌 그리고 욕실이 2개로 구성된다. 이를 4인 가족 기준으로 나눠보면, 일인당 점유면적이 6.35평(21m2)에 해당한다.
국민주택이 처음 우리나라에 등장 한 것은 1981년 정부가 서민들을 대상으로 저렴한 가격에 주택을 공급하기위해 주택법을 개정하면서부터다. 따라서 국민주택규모는 세제완화 등의 혜택이 많다. 헌데, 우리의 공동주택은 유난히도 정부의 규제가 많은 편이다.
국내 아파트는 5일(기둥식 경우 3~4일)에 한층 씩 올라간다. 세계에서 유래를 찾기 어려운 패
덧붙여 ‘빨리빨리’라는 특유의 민족성 또한 반영되어있다.
이렇게 아파트에 돈이 많이 모이니 자연스럽게 인테리어수준은 또한, 매우 화려하게 되었다.
# 집적의 효율
유난히도 우리의 아파트는 고밀도를 보인다. 고밀도는 인프라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건설비용을 줄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인 재개발사업에서 통상 1,000세대는 일반적이다. 경우에 따라 5,000세대를 훌쩍 넘기도 한다.
이처럼 한꺼번에 밀도를 높여 개발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매우 드문 현상이다. 이웃 간에 상호 양보를 필요로 암묵적 동의가 필요한 고밀도. 어쩌면 조그마한 방에서 가족이 밀착해 살아온 우리네 문화적 습성이 암묵적 동의로 반영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닮은 듯 다른 공간
아파트는 비슷한 평형과 세대로 조합되는 경우가 많다. 웬만해서는 단위세대의 종류가 한단지에 10개 이상을 넘지 않는다. 이는 효율적인 공급을 위해서다. 하지만, 겉에서 보는 모습과는 달리 내부공간을 찬찬히 보면, 수많은 공간의 유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33평형 어느 하나 똑 같은 것이 없다. 안을 들여다보면 우리는 꽤나 다양하다.
#발코니 미학
아파트의 발코니는 건설사에서 공짜로 제공하는, ‘덤’이다. 국내 기후여건상 여름엔 차양구실을 하고 겨울에는 온실구실을 하는 발코니공간은 필수적인데, 이처럼 꼭 필요한 공간을 ‘덤’으로 제공하며, 거주자의 만족감을 자극한다.
그런데 발코니는 왜 하나같이 비슷한 형식일까.
그 까닭은 발코니가 벽체에서 평균 1.5미터 이상 튀어나가지 못 하도록 규정한 건축법규가 다양한 외관의 구성과 활용에 발목을 잡기 때문이다.
만약, 발코니 폭이 2미터로 넓어지던지, 평형에 따라서 다양하게 폭과 길이를 조절할 수 있다면, 더욱 다양한 도시의 표정 연출이 가능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정부는 아파트의 획일적인 외관을 개선하고자, 여러 가지 노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소간의 난관이 있다. 이는 아파트가 사유재산이기에, 정부의 제약이 사유 재산권을 침해하는 수준까지는 미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아파트의 공간학, 쾌적한 삶을 담는 기계
언젠가 드라마에서 유행한 대사 “네 안에 나 있다.”를 이렇게 대치 해보자.
“아파트 안에 한옥 있다”.
아파트는 경제적 효능 외에도 건축문화 콘텐츠로 당당히 외칠 수 있는 공간의 묘한 법칙들이 숨어 있다.
1. 사랑방의 부재
통상, 공간은 깊을수록 또는 높을수록 안전하고 권위있게 느껴진다. 그래서 가장 높은 곳에는 사회적 위계가 가장 높은 사람이 거하거나 물건 등이 놓인다.
그런데, 아파트는 단이 없다. 따라서, 경사지게 지어져 세대내부에 단이 형성되는 한옥과 달리 아파트는 세대 내 위계가 구현되지 않는다. (물론, 세대 간의 층수에 따른 위계 로얄층은 있지만.)
이러한 수평적 공간 전개는 여성의 가사작업에는 상당히 효율적이지만, 남편들은 다소간의 불편이 있는 듯하다.
이는 사랑방의 부재와 관련이 깊다.
한옥의 사랑방은 남편의 외부와 소통의 공간으로 이는 안채의 편안함을 높이고, 사회적 활동을 돕는다.
하지만 아파트에는 사랑방과 같은 이른바 ‘전이공간’ 역할이 소멸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남편들이 집 밖에 더 오래 머물게 된 건 아닌지...
2.천정높이의 소멸
한옥 마루는 별도로 천장을 설치하지 않았다. 방은 아늑함을 위해 천장을 두는 반면, 마루는 사는 이의 기개를 높일 수 있도록 배려한 심리적 편안함의 지원 장치다.
이러한 공간형태는 여름철의 냉방효율을 높일 수 있도록 한 친환경적 지혜도 숨어있는데, 이처럼 공간이 주는 감동은 특히 높이에서 배가 된다.
그런데 아파트의 천장은 2.3미터 내외로 차이가 없이 균질하다. 높이의 소멸은 아파트 공간 안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3. 남향배치가 좋다?!
우리민족의 남향선호는 특히 유별나다. 거실을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보던 시기에는 거실의 폭을 넓히고, 부엌이 중요하다고 하던 시기엔 부엌을 남향에 둔다. 남향은 일종의 우대석인 것이다.
그렇다고 북향이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빛을 일정하게 받아야 하는 스튜디오나
오피스 등은 북향이 더 편하기도 하다.주거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서재와 같은 공간은 굳이 남향을 고집할 이유가 없다.
즉, 향(向)은 거주자의 성향과 사용목적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최근에 조망의 가치가 부각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배치의 자유로움이 증가하고 있다. 다행스러운 현상이다.
4.아파트는 방들의 묶음이다.
서양의 공간은 유목 민족의 삶의 양식을 반영하고 있다. 침대까지 신발을 신고 들어가고, 삶의 행태는 가구를 통해서 담아진다. 가구가 생활의 중심이고 공간은 쓸모에 따라 구획이 되고 특성이 명확하다. 이런 까닭에 서양의 집은 문을 닫으면, 소통이 단절된다.
하지만, 우리민족의 공간은 다르다. 일단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면, 우리 집이다. 방문을 열면 아예 신발을 벗고 들어온다. 이러한 공동체적 공간 활용방식은 매우 편리하며, 쾌적하기도 하다. 아파트는 이러한 공간 체험의 정서를 그대로 전승 하고 있다.
예를 들어, 거실과 마스터베드룸과 같은 방의 구분이 있기는 하나 맨발로 거닐 수 있도록 바닥이 하나로 이어져 있어, 공간체험의 기억이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는다. 이처럼 아파트는 개별적 기능들의 집합이 아닌 방들이 크기와 위치를 달리한 조합이다.
5.아파트는 풍수를 본다.
풍수는 사람과 환경간의 유형학이다. 아파트에 풍수의 도입은 이미 널리 시도되고 있는데, 이는 사는 이의 심리적 안정을 높이기 위해서다. 정보의 대부분이 시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므로 이러한 정보는 당연히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끼친다.
통상 양택 풍수에서 다루는 ‘문, 주, 조’의 배치방식 및 문턱의 높이 등을 중요히 다루며, 아파트도 이러한 원리는 똑같이 적용된다. 예를 들어, 거실이든 방이든 가리지 않고 바닥부터 천장까지 설치하는 큰 창이 능사는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 작은 창이 효과적인 곳도 많다. 각 실의 기능과 기후여건에 맞추어 알맞은 창의 크기와 위치가 다시금 고려될 필요가 있다.
6.아파트의 온돌과 마루
한옥은 온돌과 마루로 대표된다. 북방의 난방형식과 남방의 환경조절장치의 절묘한 조합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온돌은 복사열을 이용하기 때문에 쾌적하고 청결하다. 온돌은 이미 한류상품이다.
하지만 마루에 해당하는 공간은 다소 미흡하다. 특히 공간의 활용목적에 따른 개방감 측면에서 더욱 그렇다. 요즘의 거실은 위치상 마루에 해당 하지만 이는 가족 간의 소통을 위한 장소로 그 목적을 더욱 뚜렷이 하고있어, 한옥의 마루와 같이 제사나 식사 등 일시적 활용의 다양한 조합공간으로써 특징은 사라졌다.
자유로웠던 마루가 갖는 개방감이 사라진 것이다. 아쉬운 대목이다.
아파트는 ‘돈’ 이라는 경제적 가치와 ‘삶의 그릇’이라는 거주를 위한 도구로써의 가치가 어우러진 우리의 대표 문화컨텐츠 상품이다.
이제 새로운 ‘한류’의 주역으로써 아파트가 세상을 놀라게 할 때를 차근차근 준비할 시간이다.
* 본 원고는 2006년 한양대학교 ’건축디자인‘ 강의록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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