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직(사무직)도 현장 경력을 필수로 쌓아야 한다며
입사 후 최대 2년정도는 현장근무를 신입사원 필수 제도로 만들어 놓은 회사는
삼성 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다들 내가 삼성건설에 기술직이 아닌 '사무직'으로 입사해서
지금 '현장에서 일해'라고 말하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놀라며,
정말? 왜? 엔지니어도 아닌데 왜 비지니스 하는 사람이 현장에 있어? 라는 답변이 돌아온다.
타 건설사는 신입 사무직들은 현장경험 없이 바로 본사에서 근무하며
현장과 컨택하는 업무들을 한다는데-
그럴 경우엔 현장감이 떨어지지 않나 궁금하다.
사실 그 점 때문에 최근 우울할 때가 있었다.
비밀로 하고 있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공개적으로 밝히자면,
정말 나랑 건설회사가 맞을까? 하는 고민 때문이었다.
여성성을 잃어가는 것 같은 모습... 예쁘고 아기자기함과는 거리가 먼...
나는 여성스러운 일이 참 좋은데, 벌써 권태기가 온 걸까? 하는 생각에
한동안 낯빛이 안좋았다.
그래서인지 우리현장 소장님은 요즘 내가 결재받으러 갈 때마다 걱정스럽게 물어보셨다.
"지연이 너 요즘 어디 몸 안좋니? 예전만큼 밝고 명랑하지가 않아보여-"라며.
그 한마디에 힘을 얻어 금새 급 방긋 표정을 지으며
"아닙니다- 속이 좀 안좋아서 그렇습니다^^."라고 답변해드렸다.
다음부터는 소장님과 팀장님 앞에서 만큼이라도 명랑쾌활 김지연모드를
유지해야 겠다고 마음먹으며-
그래서 다른 계열에 종사하는 친구나 언니들을 만나며 그네들의 24시를 들어봤다.
또 대학생의 젊음이 느껴지는 홍대거리를 최근들어 자주 누비며
예쁜 까페에서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생각에 잠겨보기도 했는데
참 희한한게 건설회사가 내 천직인지, 금새 마음이 극복되더라. 정말 신기했다.
내가 여자임을 계속 생각하게 하는 그런 직업, 패션계, 작고 아기자기한 일을 하는 일,
글을 쓰는 일 이런 것들을 정말 미친듯이 하고 싶었는데-
그건 결국 하루 이틀 취미생활로 하고 나면 나의 욕구는 쑥 가라앉고 마는
단순한 반항심이었다.
문득 건설회사 다니는 여자들이 어떤 일을 한다고 생각할지 일반인들의 생각이 궁금했다.
그래서 최근 카카오톡으로 지인들 몇 명에게 물어봤다. 나이와 실명을 밝히겠다.^^
++++++++ 질문 1. 건설회사는 어떤 일을 할 것 같아?
++++++++ 질문 2. 건설회사 다니는 여자들은 어떤 일을 할 것 같아?
(1) 김정원. 25세. 외국계 회사(HLDS)
건설회사는 현장에서 직접 뛰고 관리하는일 건물 짓고 하는 일들을 하지 않나?
건설회사의 이미지는 간지나고 보람있는 일을 할 수 있을 거 같은? 뿌듯함이 느껴지는? ㅋㅋ
건설회사 다니는 여자는 일단 세련됐고 능력있어보여요. 똑부러진 이미지.
(2) 최희성. 27세. 토목과 대학생
건설회사는 사람이 더 살기 좋게 하는 구조물을 만드는 일을 한다.아파트, 도로, 항만, 플랜트, 등등. 너무 많아서 다 열거할 수 없지만 총칭해서 사회간접자본을 만드는 일이겟지.건설회사의 이미지는 "황토색 모래가 가득 쌓인 더운 사막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불도저를 몰고 있는 사람" 이 정도?건설회사 다니는 여자는 주로, 설계나 사업관리를 할 것 같다. 사무실에서 일할 것 같다.
현장 아저씨들과 부딪히는 일을 하지 않을 것 같다... 이건 단순히 내가 생각하는 솔직한 이미지.^^
(3)고은애. 26세. 고등학교 선생님
대규모 아파트단지나, 업무, 편의시설을 지을 것 같다. 건설회사의 이미지는 역동적이다.
건설회사에 다니는 여자는 현장 일보다는 서무일을 할 것 같다.
이렇게 말하면 되는건지 모르겠네^^ 어렵다ㅠㅠ
다양하고 재미있는 답변, 공감하는 것도 있고, 의외인 것도 있어서
참 재미있는 설문놀이였다.
그렇다면, 난 대학생 때 건설회사를 어떻게 떠올렸을까...
상세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게
'술 많이 마시는 하드코어 직장'이라는 이미지였다.
그리고 수주하기 위해서 영업하러 다니는 모습? 이런것들을 떠올렸다.
특히 여성 건설인력들을 생각할 땐.
그런데 막상 입사하고 약 1년 동안 업무 사이클을 대강 알게 되고나서
(감히 완벽하게 안다고는 말 못하겠다.)
기존에 상상했던 건설회사의 이미지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업무도 있다는 걸 알고
우리 회사에 더욱 애착이 생기고 '내 회사'라는 소속감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게다가 출근시간이 이르다는 점이, 내가 새벽형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초반엔 정말 힘들었는데 지금은 그게 참 좋고 감사하다.
아침에 사내 메신저에 로긴을 하면 있는 사람들은 우리회사 사람들 뿐이고
다른 계열사 동기나 선후배들은 8시가 넘어서야 출근했다는 초록불이 켜진다.
그런 걸 보면 괜시리 뿌듯함을 느낀다.
우리 회사가 가장 부지런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만 모여있는 것 같아서.
가끔 여자친구들끼리 모이는 자리에서 난 그녀들에게 내 업무의 스릴감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자랑 비슷한 설명을 해준다.
그녀들은 신기하게 듣기도 하고 재미있다며 배꼽을 잡고 웃기도 한다.
건설현장 막내로서, 그리고 공대출신 사무직 직원으로서,
기술직 여성분들과는 조금 다른 '현장을 챙기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크고 작은 웃음이 빵빵 터지는 에피소드가 많기 때문이다.
현장을 챙긴다는 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우리 직원들이 field에서
안전하게 행복하게 업무에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입사 후 약 3개월간 교육을 받을 때 현장 사무직의 역할은 Sense라고 들었는데
그 당시엔 그 의미를 잘 몰랐었다.
하지만 이제 1개월 뒤면 입사 1년. 내 현장에 정들 만큼 정도 들고,
무엇보다도 현장 선배님들께 정이 듬뿍 들었다.
훗, 대학졸업하고 갓 입사한 새내기로 처음 가재울뉴타운 재개발3구역 현장에
OJT사원으로 발령받았을 때가 기억난다.
쌀쌀한 늦가을 날씨, 첫날이니 8시까지 출근하라고 하셨지만 길을 헤맬까봐 겁이나서
미리부터 도착해서 7시부터 현장사무실 출입구 게이트 앞을 서성였던 내 어린 모습.
생각보다 긴장은 안했었다.
아무것도 몰랐기에 그저 해맑게 풋풋한 미소로 만나는 사람마다
90도 인사를 드리고 첫 날을 보냈던 것 같다.
첫인상이 무서웠던 나의 첫 상사, 하지만 알고 보니 마음이 너무나 따뜻하신 관리팀장님-
내가 앞으로 하게 될 업무를 차근차근 인수인계 해주셨던 친절하신 사수, 3년차 선배님-
그리고 내가 속한 '관리팀'에 계신 자재 대리님, 노무 대리님, 서무언니-
다들 날 막내로써 아껴주시고 귀여워해주셔서 정말 행복한 OJT 3개월을 보냈다.
그런데 4개월차가 되는 날 부터 사수가 갑작스럽게 본사로 발령을 받고,
모든 업무를 내가 다 처리해야 하는 걱정스러운 사태가 발생했다.
아직 현장 돌아가는 것, 용어들에 대해서 어색하고 미숙한데
현장의 엄마로써의 역할을 무턱대로 하려니 한숨이 팍팍 나왔다.
그래서 그 때부턴 팀장님께 몇 번 꾸지람도 듣고,
다른 팀이 하는 업무와 내가 속한 아파트 현장의 시공 사이클과
착공부터 준공까지의 업무일정을 나름 독학해보며
각 단계별 해야할 일이 뭘까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 이후 다행이도 일을 도와줄 동기가 한 명 우리현장으로 발령받아
업무가 분담되어 마음이 많이 편해졌지만
그 동기가 아니었어도 몇 개월 반복해보면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업무라는 걸 깨달았다.
사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이 무언가를 창조하는 일이 아니라면 처음에만 어렵지 반복되면 될수록 루틴하고 단순해지는 법이니까 말이다.
내 하루일과를 생각나는대로 적어봤다.
첫째, 현장에 주차장 여건이 괜찮으면 자차로 출근.
아니면 대중교통으로 이동. 새벽 6시까지 보통 출근-
지각할까봐 가끔 새벽 6시까지 아예 일찍 가서
여자 휴게실에서 30분정도 취침을 취하기도 함.
둘째, 6시 반쯤 우리 직원들의 근태를 체크함, 7시에 아침조회 참석하고 5분정도 작업자들과 삼성체조를 하고, 20분정도 안전조회 실시
복장상태 점검 시간에 둘씩 짝지어
(안전모상태 좋아, 안전벨트상태 좋아(좋아), 안전화각반상태 좋아)라는 말을 하는데
그게 바로 건설회사의 트레이드마크같은 구호?라고 볼 수 있지..
셋째, 현장 패트롤. 보통 현장은 위험하기 때문에 둘씩 다녀야 한다.
패트롤은 보통 기술직은 전부 하지만 사무직(관리팀)은 할 때도 있고 안 할때도 있다.
넷째, 사무실로 복귀해서 그날의 업무 시작-
현장 사무직의 주 업무는 쉽게 말해 현장에서 쓰는 돈을 관리하는 일이다.
따라서 그날 그날 금고 시재의 변동을 체크하고 필요자금을 본사에 청구하고,
들어온 자금을 은행에 가서 집행하는 일이 경리업무의 주업무다.
마치 가정으로 말하면 일반 생활비처럼 쓰이는 명목이 '현장관리비'이다.
이건 전체 공사금액으로 보았을 땐 굉장히 작은 부분을 차지하지만,
어떻게 다루는 가에 따라 현장의 살림살이와 현장분위기의 웰빙의 정도?가 달라진다.
그 외에 큼직큼직한 자금이 오고가는 건 외주비(협력사에 드리는 돈),
노무비, 경비(자재비 등)등이 있다.
몇 억, 몇 십억이 왔다갔다 하는 자금 청구이기 때문에
OJT 실습 때부터 가장 손이 부들부들 거리는 업무 중 하나였다.
그 다음 자재(철근, 단열재, 레미탈, 몰탈 등)를 발주하고, 받는 것도 관리직의 업무인데
가장 복잡하고 손이 많이가며 업체나 본사와 통화할 일이 많은 일이다.
노무 업무는 작업자(일용직 근로자)들의 근태관리와 근로자 식당관련업무, 시공 반장님들을 챙겨드리는 업무 등이 주업무다.
나는 보통 경리업무를 맡는데 내 업무를 통해 실제 나의 인생에도
도움이 많이 되는 습관이 생겼다.
조금 더 철저하고 꼼꼼하게 내 인생 재무관리를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붙게 해주는 일:)
하지만 이런 일보다 가장 중요한 건 정신적, 멘탈적인 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챙겨야 할 일'이 내 역할이다.
사소해보이지만 자잘하고 손이 많이 가는 일들...
가령, 직원생일자 다과회 챙기기, 야식 챙겨드리기, 새로 발령받은 직원 챙기기,
소장님, 팀장님들 챙겨드리기, 계절간식 챙겨드리기, 직원 휴일근로시 수당챙겨드리기,
평일야간작업시 챙겨드리기 등등...
그냥 서운해하지 않도록 무조건 다 신경쓰고 챙겨야 하는 일들이다.
이렇게 써놓고 보면 '아 뭐야 일도 아니다. 너무 쉽네. 저런걸 일이라고 적어놔?'라고 할 수도 있지만
딱딱한 업무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만족시켜주는 일이 제일 어렵다고 난 말하고 싶다.
사람을 챙겨준다는 건 맹목적으로 무뚝뚝하게 무성의하게 하면 다 티가 나는 법이다.
정말 그 사람을 위하고 아끼는 마음으로 사랑으로 대해드려야 받는 상대방도 내 마음을 느끼고
고마워하고 본인의 업무에 더 충실할 수 있을 거다.
마치 우리 엄마가, 아빠가 행복한 마음으로 출근하시게 도와주고
퇴근길에 맛있는 사랑의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렸던 것처럼.
보통 가정에서 엄마가 하는 일
즉, 엄마로써 아이들 챙기고, 부인으로써 남편 성실하게 내조하고,
알뜰 살뜰 지혜롭고 현명하게 집안 살림을 꾸려나가는
약간은 나를 희생하고 남을 위해 삶을 사는 그런 모습-
그런 모습을 가진 관리사원이 내 현재 포지션이라는 걸 느끼는 요즘.
뜨거운 땡볕에서 땀흘리고 고생하고 들어오는 기술직 선배님들을 보면 정말 멋있다.
특히 여자 선배님들을 보면 더 더욱 멋있다.
저렇게 가녀린 몸으로 작업자들을 전두지휘하면서
당당하게 현장을 걸어다니는 모습이 존경스럽다.
그래서인지 내 위치에서 나도 더욱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자극을 굉장히 많이 받는다.
나는 건설현장에서 근무하지만 실내 근무가 주되기 때문에
진짜 건설인이라고 말하기에는 약간 부끄럽긴 하다.
하지만 난 내 일이 정말 재미있고, 신난다.
내 손으로 아파트를 쌓아올리는 건 아니지만 키가 무럭무럭 자라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현장의 모습에 누구보다 감동하고 뿌듯해한다.
내가 관리하는 현장 자금으로 열심히 일한 협력업체 근무자분들이 월급을 받으실테고
내가 챙겨드린 사랑가득한 마음으로 우리현장 삼성 선배님들이
안전시공을 하시고 계신다는 생각에 더욱 신이 난다.
신난다는 말을 너무 남발했나? 그런데 정말 신나는 우리회사다.
여성복지혜택도 최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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